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서 대분열 (문단 편집) == 배경 == 그 근원을 따진다면,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지속적 침공을 받다 결국 공중분해되어 버려 서방 세계에 헬게이트가 열린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이것의 책임을 서로마를 "포기"한 동로마에 돌리는 견해가 있는데 학문적으로 근거 없는 얘기다. 동로마와 서로마 사이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건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이지만 이건 두 로마 제국의 주도권이 책임감 있는 황제가 아닌 자기 잇속밖에 모르는 권신들에게 넘어간 속사정 탓이었다. 물론 스틸리코는 그렇지 않았지만, 하필 스틸리코의 홈그라운드는 서로마였던 데다가 다른 정치력 있는 부하도 없어서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동서 로마의 협조 체제는 나름 복원되지만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반달족을 격파하러 대규모 원정군을 보낸 것이 반달족의 화공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면서 동로마가 큰 경제적·군사적 피해를 입어(원정군 규모가 10만 명, 동원한 배는 1000척을 훌쩍 넘었다. 이 원정군을 편성하기 위해 동로마는 13만 리브라('''금 48톤 750kg 상당''')의 예산을 쏟아 부었다. 대규모 인력과 비용을 쏟아 부은 이 원정의 실패는 동로마를 근 30년 가까이 괴롭혔다.) 이후 더이상 서로마에 개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결코 동이 서를 포기한 게 아니었다.] 여하튼 서방 세계가 개박살 난 와중에도 어찌저찌 야만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켜가며 어떻게든 생존한 서로마 교회는 [[게르만족]]을 개종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동서 교회는 서로마의 급작스런 붕괴로 인해 벌어진 헬게이트를 수습하는 동안에는 멀쩡히 하나의 통합된 지체를 이루고 있었으나, 서방 교회가 어찌저찌 야만인들을 개종시킨 끝에 이 난장판이 수습되자 이미 로마의 동서 분리 때부터 슬금슬금 올라오던 수위권 떡밥이 또 튀어나오게 된다. 또, 이미 교리적 논쟁이 일어나서 본래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정교회]]와 [[콥트 정교회]]라는 두 교회로 분열되는 등 이미 꽤나 오래 전부터 교회의 일치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가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동방 교회들 간에 수위권 타령 = 신앙적 자살이 된 현대에선 저 교리 분쟁은 사실 '''오해'''였다고 결론났다.] 또,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의 진출로 인해 레반트 지역, 북아프리카, 이집트를 영구 상실하고 만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위기까지 겪었으나, 간신히 이슬람 세력을 격파하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돌려보자. 313년 밀라노 공인으로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은 이후 로마 제국 전역의 교회는 니케아 공의회 기준으로 세 중심지인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훗날 신흥 세력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올라오고 예루살렘도 합세하며 5개 중심지 체제로 바뀐다. 이들, 즉 로마 제국의 총대주교 5명을 펜타르키아라고 하는데 펜타르키아의 구성원은 [[교황|로마 총대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다. 여기서 신흥 세력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동방의 기존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와 갈등을 겪는데, 여기서 로마가 베드로가 세운 3개 주교좌(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사상을[* 비록 알렉산드리아는 마르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지만.] 선호했다. 그리고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고토 회복 전쟁의 결과 동로마는 옛 서로마의 강역 중 상당 부분을 수복한다. 수복한 지역에는 옛 수도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 또한 포함이 되어 독립적인 교회 수장이던 교황은 다시 동로마 황제의 산하로 들어온다. 수복한 이탈리아 지역에는 [[라벤나]] 총독부가 설립되어 동로마 황제가 베드로좌를 보호했다. 그 결과 교황은 로마 교회의 사제단이 선출하여, 황제의 대리자인 라벤나 총독에게 '''선출을 보고'''하는 등 복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잡음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5명의 총대주교가 대략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 칼케돈 공의회에서 2위로 격상]>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 순의 서열로 전 세계의 교회를 관리하며 동로마 황제가 신앙의 수호자로서 이들을 보호하는 보편 교회 자체는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7세기 이슬람의 발흥으로 인해 보편 교회의 근간이 뿌리채 흔들리게 된다. 동로마가 레반트, 북아프리카, 이집트 일대를 상실하게 되는데 하필 이 지역에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가 포함되는지라 3개의 총대주교좌 또한 이교도 손 안에 들어가고 결국 기독교 세계에 남은 총대주교좌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이 둘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세기까지는 동서 대분열이 일어나지 않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하나의 교회로 일치되어왔다. 흔히 알려진 [[필리오퀘]] 논쟁의 경우, 6세기 쯤이면 이미 라틴 교부 개개인의 견해를 넘어 서방의 지역 시노드들에서 채택되었으며 수백년간 동방에서도 이를 일치의 장애로 여기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개인들은 있었지만, 교회 일치의 면에서 필리오퀘는 결정적인 문제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거룩한 그리스 교부들의 정식들은 설명될 수 있고 또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거룩한 라틴 교부들의 정식들을 비롯해 필리오퀘 역시 그렇게 설명되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각자가 지닌 고유한 독창성에 대해 온전히 존중하고 양측 간의 합의를 강조해야 한다. '''6세기를 기점으로 '필리오퀘'는 서방 전통 안으로 들어갔으며, 이는 교회 간의 일치가 다른 여러 동기로 인해 분열되기 전까지 결코 교회 일치의 장애물로 간주되지 않았다.''' >---- >-정교회 [[아드리아누폴리스]]{{{-2 (하드리아노폴리스)}}} 대주교 [[https://en.wikipedia.org/wiki/Damaskinos_(Papandreou)_of_Adrianople|다마스키노스]]{{{-2 ''Δαμασκηνός''}}}, 'Réflexions et perspectives et au sujet du rétablissement de la communion sacramentell', ''Oriente Cristiano'', 15 {{{-2 (1975)}}}, 7-25; cité dans ''Irénikon'' 48 {{{-2 (1975)}}}, p.219.[* 이 인용문은 가톨릭의 [[https://en.wikipedia.org/wiki/Yves_Congar|이브 콩가르]]{{{-2 ''Yves Congar''}}} 추기경의 저서인 [[https://www.catholicbook.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7961|《나는 성령을 믿나이다》]]{{{-2 ''Je crois en l'Esprit Saint''}}} 제3권에서 찬성과 함께 언급되었다.{{{-2 (본문의 인용문도 콩가르 추기경의 이 책 한국어판에서 그대로 발췌한 것이다.)}}} 정교회와 가톨릭의 이 두 주교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필리오퀘에 대한 논쟁은 동일한 신앙에 대한 두 표현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6세기엔 필리오퀘가 개별 교부의 견해를 넘어서 서방의 지역 시노드 차원에서 채택되었고, 동서방의 개별 교회들은 이를 친교 속에서 받아들였으며, 수백 년간 단죄되지 않았다. 가톨릭에선 필리오퀘에 대한 교의는 물론이고, 논쟁 그 자체도 동서분열의 결정적 원인이 아니라고 본다. 정교회의 경우 인용된 다마스키노스 대주교를 포함해서, [[https://ru.wikipedia.org/wiki/%D0%91%D0%BE%D0%BB%D0%BE%D1%82%D0%BE%D0%B2,_%D0%92%D0%B0%D1%81%D0%B8%D0%BB%D0%B8%D0%B9_%D0%92%D0%B0%D1%81%D0%B8%D0%BB%D1%8C%D0%B5%D0%B2%D0%B8%D1%87|바실리 볼로토프]]{{{-2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Болотов''}}}, [[https://en.wikipedia.org/wiki/Sergei_Bulgakov|세르게이 불가코프]]{{{-2 ''Серге́й Никола́евич Булга́ков''}}}, [[https://en.wikipedia.org/wiki/Paul_Evdokimov|파벨 에브도키모프]]{{{-2 ''Павел Николаевич Евдокимов''}}} 등의 성직자/신학자들이 필리오퀘 논쟁이 가톨릭과의 분열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본다.] 가령 동방 교부인 고백자 성 막시모스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는 성령"이라는 라틴 신학의 명제를 표현 차이로 보았고, 라틴 신학의 이 명제에 명시적으로 동의하였다. >물론 도시의 여왕(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람들은 지극히 거룩하신 현 교황님의 시노드 서한을 공격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쓴 모든 장(章)들을 공격한 것은 아니고 그중에서 두 장만 공격했습니다. 하나는 (삼위일체) 신학으로 그들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은 또한 성자로부터도 자신의 발출{{{-2 (''ekporeuesthai'')}}}을 갖는다." 또 다른 하나는 신적 강생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로마인들)은 첫 번재 사안과 관련해서 만장일치로 라틴 교부들의 증언들을 제시했으며, 거기에 더해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가 성 요한의 복음에 대해 작업했던 거룩한 연구에 따라 그의 증언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여러 증언에 바탕을 두고 성자를 성령의 원인{{{-2 (''aition'')}}}으로 만들지 않은 점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ㅡ 실상, 그들은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점, 곧 한 분은 출산을 통해서 다른 한 분은 발출{{{-2 (''ekporesi'')}}}을 통해서 유일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ㅡ 무엇보다도 그들은 성자를 통한 발출{{{-2 (''to dia autou proïenai'')}}}, 그리고 이를 통한 본질의 일치와 동일성을 입증했습니다. ··· 그러므로 그들{{{-2 (로마인들)}}}은 잘못 비난 받은 것들과 관련해서 비난당했습니다. ... 당신의 질문에 따라, 저는 로마인들이 자신들에게 고유한 것{{{-2 ("또한 성자로부터")}}}을 번역하도록 청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서부터 유래할 수 있는 애매모호함을 피하게 했습니다. ... 그밖에 그들의 생각을 하나의 언어로, 그들의 모국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외국어로 표현할 수 없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 >-고백자 성 막시모스{{{-2 (AD 580-662)}}}, 키프로스의 사제 마리노스에게 보낸 편지{{{-2 (AD 655)}}}[* 번역은 Yves Congar 지음, 윤주현 옮김,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 제3권 113-114쪽에서 발췌.] 아무튼 흔히 제기되는 단순화와는 달리, 필리오퀘 그 자체는 당대에 동서를 분열시킬 결정적 차이는 아니었다. 또한 로마 주교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의 교회정치적 경쟁 구도 역시도, 동로마 황제의 존재 때문에 어떻게든 중재가 되고 있었다. 후대인이 보기에는 동로마 황제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를 편들었을 것 같지만, 그건 분열 이후의 상황을 분열 전의 상황으로 소급해서 생각한 착각이다. 분열 전에는 로마 주교이든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이든 황제 입장에선 둘 다 정당한 주교이고, 오히려 '같은 도시'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를 견제하기 위해 로마 주교와 협력하곤 하였다. 요컨대, 신학적으로든 교회정치적으로든 어떻게든 일치를 이뤄가고는 있었다. 동시에, 동서방 사이에서 상호 경쟁구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